"‘감자바우’라는 말이 있다. 척박한 땅에서 감자를 주식으로 삼아 굽고 삶고 지지고 볶고 튀기는 가운데 감자전분으로 옹심이를 만든 투박한 강원도 사람들의 우직함과 근면함과 성실함을 일컫는다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감자바우들의 손끝이 빚는 감자옹심이는 언제고 따뜻하고 투명하다. 별거 없어도 족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
[편집 전영애 기자] 단풍이 일찍 물드는 설악산의 11월은 그야말로 인산인해다. 어디 설악뿐일까? 전국이 행락객으로 넘쳐난다. 짙푸른 녹음이 물러나면서 단풍이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사이, 반대로 바다의 생명들은 추운 겨울을 대비해 한껏 몸을 살찌운다. 단단한 살집과 기름기로 몸을 채우고 차디찬 수온을 견디는 겨우살이를 준비한다. 땅과 뭍이 초라해지고 스산해지는 겨울, 역설적으로 바다는 가장 맛있어진다.
1970년대 북평장터.(제공=북평민속시장)
산과 바다의 맛을 아우른 동해안 여행의 백미는 이름도 상징적인 ‘동해시’다.
지금에야 고속도로가 시원하게 뚫린 양양이니 강릉이니 주목받지만 ‘동해’시는 뭐니 뭐니 해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애국가 첫 소절의 화면으로 유명해진 추암 촛대바위를 둔 곳이 아닌가? 일출이 바위에 걸리는 모습이 형언할 수 없는 장관으로 소문난 영동의 해돋이 절경 촛대바위. 소싯적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야간열차를 타고 새벽녘에 당도해 추암에서 사진 한 장씩 찍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이었을 것으로 기억된다. 일출을 기다리기엔 너무 추워서 슈퍼에 들어가서 컵라면이라도 들이키며 몸을 녹이러 들어가던 찰나, 손사래 치는 주인장이 “남자부터 들어오시오” 하던 그 퉁명스러운 말투를 기억한다. 바닷가 사람들에겐 첫 손님이 여자면 안 된다고. “아직도 여자를 첫 손님으로 터부한다고?” 그러나 곧이어 따뜻한 물이며 이것저것 챙겨주던 그 투박한 다정함에 금방 마음이 풀리고 따뜻해졌던 기억이 있다. 거친 파도에 생사를 걸다 보니 어찌할 수 없이 바닷가에 진득하게 남은 생의 고집과 일상으로 읽혔다. 오늘이면 날씨가 아주 좋아서 일출 찍기 좋겠다며 젊은 신혼부부에게 운이 좋다는 덕담도 아끼지 않은 슈퍼 주인아저씨를 기억한다. 달력 사진으로 써도 좋겠다며 스스로 자찬했던 그 추암의 사진들은 지금 어디 있을까?
내게 동해시는 관광지로 개발된 도시들인 강릉, 양양, 삼척 사이에서 가장 ‘동해’스러움을 간직한 땅이다. 추암 촛대바위도 그렇거니와 촛대바위 지척에 있는 북평민속시장 때문이다.
3일과 8일장인 ‘북평민속시장’은 강원도뿐 아니라, 전국적인 규모의 장터다. 성남 ‘모란장’, 전북 ‘이리장’과 전국 3대 규모의 오일장으로 손꼽힌다니, 가보지 않고선 그 규모를 쉬 짐작 마시라.
1963년에 발행된 삼척읍지에 따르면 ‘1796년(정조 20년) 장세를 받았다고 기록’돼 있으니 무려 228년 역사를 지녔다. 오랜 역사만 내세우면서 겨우 체면치레로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아니다. 국도 7호선과 38호선, 42호선과 동해고속도로까지 지나면서 ‘동해항’을 지척에 둔 터라 북평장날이면 강원도가 들썩인대도 과언이 아니다. 동해의 중심이었던 삼척 지역의 북쪽 들판에 선 장이라서 이름이 ‘북평’이라 하는데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아직도 ‘뒷드르장’, ‘뒷뚜르장’이라 부르며 느릿한 걸음을 앞세우고 국밥 한 그릇 자시러 온다고 한다.
북평민속시장의 현재 모습. 2024.11.05 이윤희 방송 작가.
오일장은 언제나 그랬다. 신문물과 전국 팔도의 물건들이 가장 먼저 소개되고 세상 이야기와 볼거리가 그득한 축제의 장이었다. 단순히 물건만 사고파는 곳이 아니라 가장 빠른 소식들과 첨단 유행이 난무하던 공간이었다. 하지만 산업화와 정보화를 앞세운 대형 할인점과 새벽 일일 배송의 파상공세 속에서 시장의 영화는 너무 짧았다. 그러나 동해의 북평장 만큼은 꿋꿋하게 전통을 고수하는 우직한 사람들이 여전히 목청껏 외치며 먹고사는 일을 드높인다. 인근 삼척, 울진, 태백과 정선에서 찾을 정도로 산과 바다, 들녘의 모든 것들이 넘쳐흐른다. 어물전만 보자면 가자미, 백골뱅이(백고둥), 곰치, 문어, 양미리와 도루묵, 말린 명태, 오징어, 쥐포, 심지어 명태 부산물 ‘명란’까지, 특유의 비린내가 씩씩하다. 산세 깊은 강원도의 자랑인 버섯들도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개 ‘1능이 2송이 3표고’라지만, 북평장에서 거래되는 자연산 송이는 그 향과 맛이 능이를 압도하고도 남음이다. 어디 송이뿐이랴, 느타리, 표고, 영지, 마트에서는 잘 볼 수 없는 뽕버섯(천마재배에 쓰이는 뽕나무버섯)까지 볼 수 있다.
코로나19를 기점으로 700명이던 노점 상인들이 500명으로 줄었고, 번번한 숙박시설이 없어 인근 삼척과 강릉에 관광객들을 다 빼앗기는 실정이지만 북평민속오일장의 생명력은 끈질기다. 5년째 대변인을 자임하는 남진수(54) 상인회장은 228년 역사와 전통을 지닌 북평민속시장의 과도기를 똑똑히 목도하고 있다. 전국 팔도의 커다란 장이란 장은 발품 찾아다녀 보면서 북평장에 대한 확신은 커졌으나 앞으로 어떻게 활성화시킬지 고민이 깊다.
“추암 촛대바위가 지척이지만서도 주차장이나 가족 단위가 즐길만한 숙박시설이 없으니, 죄다 강릉이나 삼척으로 먹고 자러 가는 실정입니다. 하지만 228년 역사의 시장이 우리 대에 와서 쇠락한다면 을매나 아깝습니까? 다들 북평장에 오면 물건 좋고 값 싸서 다들 놀랩니다. 뭔가 딱 하나만 더 있으면 될 것 같은데... 젊은 사람들이 찾는 장터로 만드는 게 우리의 꿈이자 욕심입니다.”
북평민속시장에서 먹는 감자옹심이. 2024.11.05 이윤희 방송 작가.
장터의 대표적인 먹거리 하면 국밥을 빼놓을 수 없다. 북평장도 본디 ‘쇠전(우시장)’이 크게 성했으나 지금은 즐비한 소고기국밥집과 국밥거리만이 쇠전의 옛 명성을 보여주고 있다. 소머리국밥집 앞에서 잠시 갈등을 했으나 이내 발길을 돌린 곳은 강원도에서만 먹을 수 있는 감자옹심이집이다. ‘옹심이’는 ‘새알심’의 강원도 사투리다. 그러나 그 어감이 어찌나 귀엽고 앙증맞은지, ‘옹심이’라 가만히 부르면 뭔가 속에서 뜨뜻한 게 퐁- 퐁- 몽글몽글 솟는 것 같다. 절대 옹심이를 대신할 단어는 없다. 그러나 이 귀엽고 앙증맞은 ‘감자옹심이’에 얽힌 척박한 땅 강원도의 구황작물 감자의 역사는 처연하고 아프다.
유사 이래 감자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한 먹거리다. 남미가 주산지였던 감자는 16세기 스페인 사람들의 신대륙 발견과 동시에 유럽 전역으로 퍼졌다. 감자가 처음부터 환대받은 건 아니었다. 땅에 묻힌 뿌리 작물을 죽음, 어둠 등 이미지로 경원시했던 탓에 ‘악마의 식물’로 천대받았으나, 유럽을 휩쓴 대기근 앞에서 오직 감자만이 구세주였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땠을까? 우리나라에 감자가 들어온 시기는 생각보다 짧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에 의하면, 19세기 청나라 심마니가 조선 국경에 몰래 침입하였다가 재배가 손쉬운 감자를 산중에서 재배하였는데 그들이 떠난 후 감자가 그대로 자라게 되고 번식력이 높아서 식량으로 쓰이게 되었다고 한다. 1832년, 영국 상선의 어느 선교사가 전라도에 씨감자 재배법을 전수했단 기록도 있으나 정작 강원도 감자가 유명해진 것은 1920년경 독일에서 들여온 신품종 감자가 강원도 난곡 농장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던 차 1974년! 미국 위스콘신대학교 교수가 개발한 ‘수미’ 감자(원명, Superior)가 국내에 품종 등록되면서 본격적으로 강원도 감자 시대의 서막이 열렸다.
감자는 토양이나 비료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무엇보다 가뭄과 장마는 물론 냉해에도 강해 강원도 고랭지의 효자 상품이 됐다. 유럽에서 땅속뿌리 식물을 죽음, 어둠과 연결시키는 데 반해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마와 토란, 칡 등 뿌리작물을 먹은 터라 감자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던 것도 한몫했으리라. 수미감자의 대성공, 수미는 국내 감자시장의 80%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올해는 수미감자 도입 딱 50주년, 반세기 만에 강원도는 감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땅이 되었다.
우리가 어떤 민족인가? 세계에서 유일하게 도토리를 갈아서 묵을 쑤는 민족아닌가. ‘칡’도 찢어서 물에 앉혀서 전분으로 반죽을 내 국수로 말거나 수제비를 뜨는 민족인데 이 ‘감자’ 따위를 가만둘 수 있으랴?
감자를 갈아서 깨끗하게 씻어서 앉히기를 수십 번씩 하는 인고의 옹심이 반죽이 있고, 주문받자마자 갈아서 뭉쳐 내는 패스트푸드 옹심이 반죽도 있다. 그렇기에 어떤 감자옹심이는 야들야들 만두피보다 부드러우면서도 쫄깃하고, 어떤 감자옹심이는 탱글탱클하면서도 서걱거리며 씹는 맛이 살아있다. 전자든 후자든 멸칫국물에 푹 끓인 담백한 감자옹심이는 맛없기가 어렵다. 집집이 저마다 감자옹심이를 대하는 필살기가 있기에 똑같은 감자옹심이래도 맛과 멋이 각양각색이다. 젓갈을 많이 쓰지 않고 양념을 슴슴하게 하는 강원도 김치 한 점 올리거나 간장과 된장을 따로 내리지 않은 강원도 ‘막장’에 양파나 풋고추 한 번 찍어 먹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나는 이 맑고도 깨끗한, 수수한 감자옹심이를... 강원도 땅을 밟으면 어찌 됐든 꼭 먹어야 한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감자바우’라는 말이 있다. 표준어로는 ‘감자바위’지만, 감자가 많이 나는 강원도 지역과 그 사람들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척박한 땅에서 감자를 주식으로 삼아 굽고 삶고 지지고 볶고 튀기는 가운데 감자전분으로 옹심이를 만든 투박한 강원도 사람들의 우직함과 근면함과 성실함을 일컫는다고 나는 여전히 믿는다. 감자바우들의 손끝이 빚는 감자옹심이는 언제고 따뜻하고 투명하다. 별거 없어도 족하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이것이야말로 북평민속시장의 맛, 동해의 맛, 그리고 강원도의 맛! 로컬100의 맛이다.
◆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KBS '한식연대기', 넷플릭스 '삼겹살 랩소디', 스카이트래블 '한식기행 - 종부의 손맛' 등 우리 식문화를 소재 삼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집필했다. 방송작가 22년 차지만 언제나 현역~! 지역마다의 고유한 맛과 멋을 알리는 맛깔난 글을 쓰고 싶다.
제공 정책브리핑실. disf@disf.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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