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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영주, 근현대사를 품은 선비의 고장

선비들의 여름나기를 따라서

등록일 2022년08월06일 00시18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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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주의 철도관사마을(사진=트래블팀 제공)


[더코리아뉴스]
하성인 기자 = 코로나바이러스전염병(COVID-19)가 주춤한 사이 사회적 거리두기 또한 완화 조짐을 보인 지난 7월, 본격적인 한여름 폭염기를 앞두고 에어컨도 없던 시절, 우리의 선조들은 어떻게 이 여름을 보냈을까?

서민들이야 때로는 훌훌벗고 등목이라도 할수 있었지만, 지체 높으신 양반들은 어떻게 여름을 보냈을까 싶은 차에 선비의 고장이라고 불리는 경북 영주로 팸투어를 떠나게 되었다.

▲영주의 관사마을을 들어서는 입구에는 철도마을임을 알리는 듯 벽화가 일러주고 있다(사진=하성인기자)


선비도시라 칭하는 영주시가 주최하고 관광벤처회사 수요일이 진행한 이번 팸투어는 수도권 관광전문기자들 10여명과 함께 청량리역에서 KTX-이음 열차를 타고 1시간 40여분만에 영주역에 도착했다.

영주역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를 반기는 것은 영주의 근대문화가 살아 있는 곳이자 영주 철도관사마을이였다. 

▲일본식 목조 건물로 지어진 철도관사(사진=하성인기자)


예로부터 선비의 고장이라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 들어서기도 했던 이곳에 철도 관사라니..? 철도 관사가 있다는 것은 한마디로 이곳이 예전에는 중부내륙의 중심지 였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해 주면서 또 한편으로는 우리나라 철도의 역사가 곧장 일제 강점기로 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을 더듬어 볼때 이곳 역시 많은 일본인들로 부터 핍박을 받은 곳은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앞섯다.

아니나 다를까. 관사마을을 들어 서니 그때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일본풍의 관사 몇채가 나란히 앉아서 그 시절을 어렴풋이 일러주고 있었다.

이곳 영주의 관사마을은 일제 강점기 그러니까 대략 1035년 쯤 중앙선 철도가 개설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기술자들과 간부들의 숙소로 지어진 건축물로 전형적인 목조 일본식 가옥인데, 철도 개통과 함께 영주가 근대 도시로의 발전을 거듭함에 따라 잘 사용되어 오던곳이 7-80년대 들어서면서 부터 정체된 도시 기능으로 시간이 멈춘듯 세월의 티를 품고 삭아 들고 있었다.

최근에는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뒤부터 차츰 차츰 관사마을에 대한 관심과 함께 유지, 보수를 이어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철도 관사마을은 이곳 영주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일제 강점기 때 주요철도가 놓인 서울, 부산, 대전, 순천 그리고 영주에 있었으며, 이로 인하여 지방철도청이 존재할 정도로 우리나라 철도역사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영주 관사골 안내도


관사마을을 잘 보기 위해서 올라선 마을 뒷산에는 '붕래정(朋來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이 정자는 아주 오래전 영주의 젊은 학자들이 상호간의 친목과 학문.정치 토론및 교육활동을 통해서 향촌의 교화와 지방행정의 발전을 추구하기 위해 모여서 계(契)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부용대라 하였으며, 이들이 모여서 회합을 한 곳이 바로 붕래정이라고 하는데, 이 부용대(芙蓉臺)와 붕래정(朋來亭)'이라는 이름은 퇴계 이황선생이 지었다고 한다.

붕래정에 올라 보니 그 옛날의 영화(榮華)를 지닌 영주시가 휜히 내려다 보인다. 일제 강점기를 지나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야트막한 산과 영주시를 가로지르는 서천의 다리, 그리고 오늘을 대변하는 고층의 아파트가 즐비하게 서 있다.

▲영주의 근대식 한옥(사진=하성인기자)


붕래정을 내려와 마을로 들어 서니 조선 명종 때 유의(선비의사) 이석간이 명나라 황제의 어머니가 앓던 불치병을 고치자 황제가 그를 위해서 99칸의 집을 지어 주었는데, 본채는 사라지고 현재는 1929년 다시 고쳐 지은 별채만 남아 있는 영주 근대한옥(등록문화재 제720-3호)이 자리 하고 있었다.

이 별채는 앞면이 7칸, 옆면이 6칸 규모의 ㅁ자형 한옥으로 한때는 한의원, 하숙집 등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며 일제 강점기와 근대 산업시기의 생활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이라고 한다.

이 뿐만이 아니다 영주 시내엔 아직 우리가 보존해야 할 우리 아버지, 할아버지,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들이 남겨놓은 삶의 현장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철도관사마을을 나와 영주시내를 거쳐 선비의 고장이라는 영주의 본 만나 볼 수 있는 소수서원을 향했다.

▲소수서원(사진=하성인기자)


우리나라의 서원은 국학의 제도를 본 떠 선현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어쩌면 최초의 '학교'라고 할수 있는 곳으로 처음에는 주로 벼슬을 하다가 낙향한 선비가 고을의 똑똑한 인재 발굴과 후학을 양성하기 위해 설립되었는데, 차츰 서원이 틀을 잡아 가자 나라의 지원을 받아서 운영된 소위 말해서 공립내지는 국립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고 볼수 있는데, 이러한 우리나라 서원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9곳이 한꺼번에 등재되기도 했다.
(영주 소수서원, 함양 남계서원, 경주 옥산서원, 안동 도산서원, 장성 필암서원, 달성 도동서원, 안동 병산서원, 정읍 무성서원, 논산 돈암서원 이상 9곳)

그 중에 이곳 영주의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져 있으며, 세종 때 풍기군수 주세붕이 풍기지방의 교화를 위해서 이곳 출신의 유학자인 안향(安珦)을 배향하기 위해서 사묘를 설립했다가 1543년 유생교육을 겸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했다고 한다.

▲퇴계 이황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 영정각(사진=하성인기자)


이후 주세붕의 뜻대로 서원의 유생들이 대거 과거에 급제하는 등 성과를 이루어 내면서 서원의 중요성이 대두되면서 후에 '소수서원'이라는 현판을 받았다고 한다.

잘 정돈된 소수서원에는 존경하는 스승을 섬기던 제향 공간과 살아 생전 스승과 제자, 교우들이 교류를 하던 유식 공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여긴 학문에 힘쓰는 강학 공간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또한 건물은 유생들의 학문년도에 따라서 각각의 생활 공간이 달리한 채 세월을 지켜 오고 있었다.

▲늘 푸르름을 잊지 말라는 선비들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듯 소수서원에는 학자수로 소나무가 가득하다(사진=하성인기자)


언제 보아도 위엄이 있는 우리의 한옥으로 된 서원을 지나 소나무가 빽뺵히 들어서 있다. 사시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는 소나무가 한 여름을 맞아 더욱더 초록빛으로 줄지어 서 있는 것은 인생의 어떤 어려움도 절개도 기개도 잃지 말고 참선비가 되라는 의미를 담아 조선 효종때 조성한 학자수(學者樹)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다.

▲소수서원을 설립한 주세붕 선생이 지은 경렴정에서 문화해설사로 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팸투어 기자단(사진=트래블팀)


학자수가 가득한 곳을 몇걸음 걷다보니 서원을 세운 주세붕 선생이 많은 유생들과 자연을 노래하며 학문을 탐했을 곳에 세운 경렴정이 자리하고 있는데, 안쪽의 경렴정과 바깥쪽의 경렴정이라는 현판이 각기 다른 글체로 새겨져 있는 것을 볼수가 있는데, 바깥쪽의 '경렴정'은 스승 이황선생이 또박또박 쓴 글씨체이며, 안쪽에는 제자 황기로가 운율이 느껴질 정도로 휘 갈겨쓴 글씨를 볼수가 있다.

하늘이 안 보일만큼 울창한 학자수림 속 경렴정 곁으로 흐르는 죽계천에는 퇴계 이황 선생이 세운 취한대가 서 있다. 연화산의 청명한 기운과 맑은 죽계천 물빛에 취해 시를 짓고 풍류를 즐긴다는 뜻이 아닐까 싶은 취한대에 서서 바라 보는 죽계천은 추절히 추절히 내리는 여름 장마비로 물빛은 탁하지만 그 누구라도 이곳에 들어서면 발걸음을 멈춰야 하지 않을까 싶다.

시 한수라도 읊고 가야 할 듯이~!

그래서 영주는 느릿하게 자연을 되돌아 보며 자연과 함께 살아온 선비들의 여름은 그렇게 지나간것이 아닌가 싶다.

▲소수서원의 취한대에서 영주시 팸투어단이 포토타임을 갖고 있다(사진=트래블팀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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